인간사회의 초상(肖像)과 자동차의 알레고리(Allegory)
안민의 예술세계

 1. 재현과 표출의 변증법
 “이것은 자동차가 아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사회심리적 발언이다”. 작가 안민의 작품들을 대면하면서 직관적으로 떠오른 이 평문의 애초 제목이었다. 그러나 전체 글의 문맥을 감안하여 보다 압축된 제목으로 변경하였다.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정신적 필연성에서 본다면, 수많은 요인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사를 겪고 응시하면서 축적되는 자기내면의 표출과 더불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는 점이 예술가로 살게 하는 첫 번 째 이유일 것이다.

 이 작가는 초기에 고양이나 여우, 곰, 뿔달린 소 모양의 머리를 지닌 관능적인 여성들이나 괴수의 남성들을 그려 보여주었다. 그는 공간과 화면의 단축법을 써서 인물들의 욕망 및 숨겨진 갈등과 허세 등을 에스키스하여 표현함으로써, 인간사회의 다양한 초상들에 대한 인상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켜왔다. 이처럼 사회와 인간사에 대한 예리한 응시를 통한 응전과 도전이야말로 이 작가의 작업 전반에 깔린 라이트 모티브이다.

 자동차, 특히 폐차의 다양한 모양새들을 속필(速筆) 드로잉으로 집요하게 표현해낸 근작들도 겉 모양만 다르지 같은 맥락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이것들은 자동차가 아니다. 뭇 인간 욕망의 부서진 껍질들이다. 비가시적인 이념의 가시적 형상화로서 조형과 미술작품의 존재구조는 감각적이고 실제적인 전경(前景) 뒤에 수많은 층위의 심리적 계층과 정신적 연관(聯關)의 이념 층을 내장하고 있다. 이른바 후경(後景)이다. 감상자의 관조작용은 그 이면의 후경을 읽어내는 일이다. ‘이미지의 표현으로서의 조형예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미술작품들은 외계사물을 묘사하는 원리적 작용으로서의 재현과 내적인 것을 외화(外化)하는 작용으로서의 표출(表出), 즉 외적 대상과 내적 충동과의 변증법적 대결의 장(場,field)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작가가 드러낸 가시적 조형들은 ‘시각 이미지의 언어학’에 비견할 만한 분석과 종합, 나아가 해석이 필요하다.

 작가는 그동안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하여 인간본성과 선악에 대해서, 개인과 사회의 정의에 대한 고민 등으로 작업”(작업노트)해왔다. 나아가 그는 “억압된 내면의 욕구, 즉 사회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욕구를 작업으로 표출”함으로서 일차적으로는 “자신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일종의 셀프미술치료의 과정 속에 있다”고 말한다. 이 작가와의 첫 대면은 국제레지던시 가창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2014)로 개인전을 열고 있을 때였다. 아주 내성적인 청년작가의 자의식과 분노, 정체된 사회시스템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억압된 심리의 노출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이후 광주 아트페어와 서울 유니온 아트페어에서 주목을 받는 등, 그의 작품들은 일상 속 억압과 권태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는 현대관중들에게도 관심을 받고 있다.  
 
2. 사회심리적 초상(肖像), 예술의 질료로서의 인간과 자동차의 알레고리
 ‘사람이라는 재료’, 이 작가에게 있어 제 일차적인 예술의 재료와 질료는 인간이었다. 이전의 작품들은 사회 속의 다양한 인간들의 두상이나 상반신, 전신상을 암캐나 고양이 늑대와 수소 등을 연상케 하는 동물들의 마스크를 입혀 표현함으로써 청년작가로서 응시해온 여러 인간 군상들의 내적 면모를 암시적으로 고발해왔다. 그러나 이 번에 전시하는 작품들에서는 인간들의 모습은 빠지고, 폐차 일색으로 기획되어 있다. 다양한 차종들의 부서진 모습들이 인간들의 얼굴을 대신한다. 길을 걸을 때나 운전대를 잡고 도로에 나서보면 일상에서 우리는 차 주인의 삶의 행태와 얼굴 등을 연상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 시대 자동차들은 그것을 부리는 차주의 성격이나 사회성, 도덕성, 인격 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작가는 어느날 길을 걷다가 인도를 막고 주차해놓은 자동차를 부수어버리고 싶은 내밀한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화폭에 표현된 폐차들은 폐차장의 이미지를 방불케 하지만, 실은 주모티브가 인간에 대한 표현이고 고발이기도 하다. 바로 사회심리적인 인간초상에 대한 알레고리, 즉 유비(類比)관계에서 표현된 이 시대의 초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듯이 도로에 나서면 난폭운전, 갑자기 끼어들기, 의도적인 사고유발 등의 수많은 사례들을 접하게 되고, 생존과 연관된 문제이다보니 충동적인 대응이 종종 일어나기도 한다. 후기산업사회 인간들의 다중인격과 영악스런 생존전략 속에서 힘없는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과 좌절과 분노는 충동적인 심리적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도 하는데, 청년화가의 무기와 발언도구는 바로 물감과 붓이다. 작업을 통해 작가는 능동적으로 불량차들을 부숨으로써 사회 속의 불량 양심을 고발하고, 나아가 자신의 분노를 조정하고 배설하며 자가치유(自家治癒)해간다. 작가의 예술의도와 그 표현의 조형적 가치와 성과를 돌아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 작가는 캔버스나 패널 위 드로잉과 함께, 광고용 SIGN 플랙스나 시트지, 색지, PVC필름, 아크릴 보드 등 위에 유채와 아크릴맄, 분필, 연필, 먹 등, 다양한 표현매체를 이용하여 작업한다. 색을 최소화하고, 주로 반투명하면서도 번들거리며 이미지를 반영하는 재료들을 사용하여 속필(速筆)의 드로잉 흔적을 강화시킨다. 번들거리는 표면을 선호하는 것은 그의 예술의도, 즉 몰염치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매체 역시 작가의 정신세계를 담지한다.

 둘째, 붓터치 몇 번으로 단숨에 그린듯한 그의 그림들은 주로 화포에 물감을 떨어뜨리고 플라스틱 크래퍼 등으로 획을 치듯이 진행되며, 때로는 스크레칭이나 물감 지우기, 흘리기 등의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점과 선과 면 사이에 매우 정교하고도 섬세한 필치와 필흔들이 엿보이고 있어 작가의 표현 역량을 가늠케 한다. 새삼 재현의 표현성을 느끼게 하는 조형 역량이다.

 셋째, 작가 자신도 아크릴 드로잉이라든가 필름지 드로잉 등으로 ‘드로잉’ 용어를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완성작품의 전단계로서의 드로잉이라기 보다 분방한 획선과 획면의 생생한 일회성에 초점을 둔 그의 회화 양식으로 자리잡은 느낌이 든다. 속도감이 강하고 긴장의 밀도가 높은 필치는 그만큼 작가가 내면의 감정을 폐차에 이입시켜 표출해낸 결과일 것이다.

 넷째, 초기의 작품들에서 동물의 가면을 쓴 것같은 두상 표현으로 인간의 다층(多層)심리를 표상했다면, 폐차들의 표현에서는 헤드라이트의 눈이라든가 타이어의 다리, 보넷 속의 엔진과 부품 등의 내장(內臟)이 마치 인간 몸체의 메타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계를 인격화하여 표현한 듯한 기미를 엿 볼 수 있는 점은, 사람들의 주민번호와 같은 해당 자동차의 넘버를 레터링으로 삽입하고 있는 대목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다섯째, 차들의 종류와 유형도 다양하다. 사회적 삶의 계급성까지도 반영하는 폐차 중에는고급 외제차를 비롯하여 짚차, 트럭, 서민용 소형차, 괴수같이 이빨을 드러낸 몰골의 폐차, 하마가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폐차, 타이어 다리가 엉뚱한 곳에 붙어 있는 차, 헤드라이트의 눈을 부릅뜨고 있는 차, 또는 추상적인 선묘로 보일정도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폐차 등등, 파괴되어 형해만 드러난 차들을 집대성해놓고 있다. 또 한편 이런 여러종류의 폐차들은 현대사회 속에 보이지 않는 계급들을 넘어 몰상식과 자기중심의 행태들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이 번 전시에서 2미터 6미터의 싸인 플랙스 위에 실제 자동차 사이즈로 그린 폐차들은 조형적인 감각에서 보더라도 작가의 공간운용의 역량을 엿보게 한다.

 이상과 같은 특징들을 종합해보면, 그가 그린 폐차들은 부서진 자동차들의 재현이 아니라, 인간 욕망의 부서진 껍질들의 표현이라고 할 만하다. 결국 인간에 대한 사회심리적인 응전과 도전의 흔적들이다. 그의 작업실은 모든 물품들이 매우 정갈하게 제 자리에 놓여 있고, 공간을 구획하여 잘 정리정돈되어 있는데, 이는 작가의 평소 생활태도를 반영한다. 그런데 이 폐차들은 무엇인가. 여기서 자동차는 작가의 심층심리와 초자아(超自我)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회의식과 감정의 매개물이며 탈개체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림의 자기표출이 사회 속에서 어떤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관중과의 공감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안민의 작품들은 그리는 일의 신체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현실인식의 사유가 기저에 깔려 있는 점에서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장미진 (미술평론, 미학)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Look Back In Anger

“분노는 나의 힘” 안민의 회화에 이런 레토릭을 가져다 쓰는 게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차선은 될 수 있다. 이번에 발표하는 연작 < 구애 >도 이 수사법으로부터 설명이 가능하다. 젊은 화가가 뿜어내는 절망은 스스로를 연민의 구덩이에 빠트리면서도 힘으로 가득 찬 그림의 동력이 된다. 그의 작품이 지금껏 그래왔듯이 공격성은 이야기의 중심이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풀어낼 수 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공격적인 본능을 아무 때나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문명의 핵심이다. 문명이 억누르는 갖가지 욕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심성의 얕은 부분에서 들끓고 있다. 술이 불러오는 디오니소스적 쾌락, 성과 관련된 리비도, 예술의 카타르시스가 그렇다. 안민의 그림도 이성 작용으로 걸러지지 않은 순간을 포착한 작업 결과인 셈이다.

연작 시리즈 < 구애 >가 우리에게 던지는 주제를 예술 담론 바깥에서 보자면, 이중적인 인성 구조의 내적 갈등이라는 진화심리학에서의 가정과 연관되어있다. 인본주의-야생성, 대뇌-간뇌, 문명-야만, 계산가능성-예측불가능성, 이성-감성이라는 인간의 이중성 가운데 이 화가가 순전히 후자의 영역에 더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은 틀린 견해다. 예술가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커다란 에너지에 자신을 던져야만 좋은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천만에. 낭만주의 예술가 태도가 미화한 예술가의 천재성과 비합리성이 오늘날 냉랭한 예술 제도 속에서는 한낱 일탈로 처리될 뿐이다. 이 점은 작가 관객들이나 작가 본인조차도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다. 대신, 작품은 그와 같은 이중성의 구도를 좀 더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그것은 이중성이 제시하는 기준의 위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한다고 될 일일까.

규범적인 문명 안에, 그리고 미술 제도 속에 갇혀있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사는 아니다. 그는 내성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곧잘 그렇듯이 주변 정황을 잘 살피고, 그 시각을 원초아(이드 Id)의 상태까지 파고 들어간다. 처음에 작가는 주변에 맞닿은 여러 인간 유형을 묘사하면서 동물을 의인화하는 작업을 펼쳤다. 이는 현실 속에 실존 인물들을 재현할 때 생길지도 모르는 난처함을 피할 구실을 만드는 비유법으로 적절했다. 취기 오른 작가가 어떤 사람을 볼 때 떠오른 동물들, 예컨대 능구렁이 같은, 여우 같은, 곰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확신컨대 작가는 나를 보고도 뭔가를 떠올릴 것이다. 난 안 물어봤다. 들어보나마나 기분 나쁠 게 분명하니까. 그의 작품 속 비유는 사람 신체에 짐승 머리를 붙인 형태를 취했다가, 근작에 이르러서는 온전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오고 있다. 속도감 있게 그린 그림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뱉어내는데, 이는 한 편으로 만화처럼 우습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슬프고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가의 연령대가 걸친 세대, 그리고 예술가라는 신분이 처한 현실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구애 > 연작은 현실 속의 자아와 타자가 상상 속에 있는 각각의 그들과 끼워 맞추려는, 하지만 결코 일치될 수 없는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그 이미지는 부당함과 피로와 의심과 고통에 겨워 위악적일 만큼 화를 내는 모습이다. 관객들은 이와 같이 뜬금없는 난폭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가는 본인, 안민이라는 한 인격체가 가지는 가장 고귀하며 사색적인 측면을 뺀 나머지를 그림에 쓸어 담아 보여준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실재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예술은 필요한 것인가? 제 정신으로는 온전히 버텨내기 힘든 제도의 장벽 앞에 내 작품의 생존력은, 아니 나의 생존 자체는 보장받을 수 있을까? 나에게 미술은 뭔가?” 그림이 암시하는 작가의 모습은 삶의 실패자 그 자체다. 하지만 말이다, 근대 이후 예술은 원래 그랬다. 샤를 보들레르가 그랬고, 존 오스번이 그랬고, 마띠유 카소비츠도 그러했다. 작가 스스로가 극적으로 몰고 간 분노는 일상 속의 평정을 가능하게끔 한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번갈아 체험하는 그는 작업을 통해 점점 성장하고 있다. 실패의 삶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보증하는 수단이 작가에게는 현재 미술밖에 없다.

덧붙여, 한 가지 남은 내 궁금증.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전부 관객인 우리를 향해 분노를 전달하고 있다. 나는 예컨대 하나의 그림 속에서 그 난폭자들이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모습을 못 봤다. 이게 직설적인 멋이 있기는 한데, 좀 단순하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고달픔은 게오르그 짐멜의 주장을 빌자면, ‘2인 관계에 제3자가 끼어들면서’ 꼬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히면서 복잡한 갈등이 벌어진다. 그런데 안민의 그림에는 그와 같은 결탁, 음모, 질투, 따돌림 따위가 없다. 단지 한 개인이 다른 누군가에게, 또는 혼자 이 세상에 맞서는 형국만 존재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즈도 말했지만, 비극이란 너무나 벅찬 세계 앞에 주인공은 애당초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맞서는 형식이다. 작가는 야단법석인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려고 한다. 여기에 분노는 정화 체계인 동시에 질서 체계다. 우리가 작가의 태도에 동의하건 안하건 그 속에서 발견되는 일관성은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지고 있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예술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