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살펴보다 보면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통해 감동받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며, 때로는 분노하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나 하찮은 일 또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지만, 우리는 종종 일상 속 빌런(악당)들을 만나고 이들의 행동에 분개한다. 보통 빌런의 악행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나 하나쯤이야’ 혹은 ‘잠깐인데 뭐 어때’ 등과 같은 쉬운 자기합리화로 시작된다. 정말 그들의 악행 동기처럼 ‘아무일 없는(것처럼 보이는)‘경우도 있지만, 사소한 행동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사소한 빌런들의 소악행 중에서도 작가 안민은 특히 인도 위 불법주차 차량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잠시의 편의를 위해 습관적으로 일반 보행자뿐만 아니라 휠체어 또는 유아차 등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통행까지 방해하는 차주의 도덕성에 분노했다. 물론 그가 이러한 악행의 피해자이자 목격자가 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사건에 화가 났던 이는 비단 작가뿐만이 아닐 것이다.
보통은 화를 내거나, 욕을 하거나 등의 방법으로 혼자서 화를 식히겠지만,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이들도 있다. 영국의 어떤 이는 커다란 돌을 인도 끝에 놓아 인도에 주차하려는 차가 손상되도록 해 놓았으며, 어떤 사람들은 처벌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수고를 들여 신고를 하기도 한다. 작가 안민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이들을 사회에 고발한다.
작가는 소소한 악행으로 얻은 행복을 위해 타인의 통행권을 방해한 이들의 차를 마치 슈퍼 히어로처럼 던져 부셔버리고 싶은 마음을 캔버스 위에 풀어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시커먼 마음을 가진 이들의 차량은 검은색으로 표현되며, 이들은 모두 반파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처참하게 부서져버린 모습도 있지만, 폭파된 듯한 모습도 있다. 작가의 분노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자동차의 파손 상태도 달라졌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눈이 달린 모습의 자동차들도 새롭게 등장했다. 자동차는 무생물이지만 마치 생물인 것 같은 의인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작가는 자동차들을 냉혈동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의 눈은 마치 뱀처럼 크고 길쭉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냉혈동물은 체온을 조절하는 능력이 없어서 바깥온도에 따라 체온이 변하는 동물로 주로 어류, 양서류, 파충류 등이 해당된다. 이들 중에는 맹독을 지닌 동물도 많은데, 그들은 자신을 공격하려고 하는 이에게는 가차없이 독을 풀어 한 번에 제압할 수 있지만, 신기한 것은 독을 품고 있는 그들에게 자신의 독은 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자신에게는 해가 되지 않는 오히려 편리한 인도에 불법주차를 일삼는 이들과 닮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무도 그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자신의 편리함 혹은 행복을 위해 큰 고민없이 일을 저지르고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난다. 남들에게는 치명적인 해가 될 수 있으나, 자신이 당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런 모습 때문에 인정이 없고 냉혹한 자신 밖에 모르는 이를 냉혈한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작업의 바탕이 되는 재료는 조금 색다르다. 광택이 있는 종이, 필름 또는 천 등 위에 검은색 오일 물감을 사용하여 거침없이 자동차를 그려낸다. 힘이 느껴지는 그의 드로잉은 미끄러운 바탕 위에서 흔적을 남기며 그의 행위를 담아낸다. 그의 화면 속에는 지우는 행위 또한 반영된다. 그린 것을 지운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또한 그의 작업 속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더 잘 지우기 위하여, 지운 흔적을 남기기 위하여, 그는 다른 작가들과는 다른 특별한 바탕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 나갈 때의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한다. 조금씩 힘의 강약을 주어야 지워지는데, 이는 어쩌면 흔적을 남기는, 그리는 작업보다 지우는 혹은 이를 수정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재현한 악의 형태를 수정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쉽지 않다.
그의 큰 사이즈 작품은 자동차의 소재와 닮은 철제 구조물이 액자 역할을 하며, 안쪽에 조명을 따로 설치된 모습으로 관람객들 앞에 선보인다. 거대한 사이즈만으로도 존재감이 분명하지만, 뒤에서 투과된 빛이 마치 전조등을 켠 자동차를 만났을 때의 느낌을 준다. 이러한 조명효과는 작품과 관람자만이 오롯이 마주하는 듯 집중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압도감을 주기도 한다. 파괴된 커다란 자동차가 일종의 경고를 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보통 선량한 혹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타인을 칭찬할 때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법 없이도 살 사람’에게 국가의 공식적인 법과 법이 가지는 강제력은 삶에서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법을 인식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within the boundary of law) 살아간다. 사실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이다. 법 안의 도덕적인 범주는 당연한 것이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 이상의 도덕을 배려와 양심 아래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법 이전에 양심에 기반을 둔 ‘상식’이란 것이 존재한다. 작가의 작품 명 이기도 한 양심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Conscience와 독일어의 Gewissen은 ‘함께 알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사실은 양심이 사회적인 규범과 개인적인 욕망사이에서 누구나 공통적으로 ‘함께 아는’ 즉, 보편적인 감정 또는 생각, 혹은 모두가 옳다고 느끼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사실 ‘양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알고’ 느끼는 보편적 생각이 바로 올바른 양심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앞서 언급한 빌런 중에는 자신의 소소한 악행이 ‘함께 아는’것에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저지르며 심지어 희열을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있고 이들의 잘못된 행동에 분개하는 작가 안민과 같은 이들이 있기에, 결국 인도 위 불법주차는 2023년 7월 계도기간을 거쳐 과태료 부과 대상이 되는 것으로 법이 개정되었다. 결국 양심의 문제로 해결될 수 있던 사안이 이를 지키지 않은 빌런에 의해 법의 테두리로 들어가 강제성을 갖게 되었다.
사실 자동차는 죄가 없다. 어찌 보면 자신만의 편의를 위해 남의 불편함 따위는 생각조차 없는 주인의 잘못이지만, 불량 양심인 주인의 차는 매번 주인대신 험한 말을 듣고, 맞고, 어떤 작가의 작업에서 파괴되기도 한다. 세상에 나쁜 차는 없다, 하지만 세상에 나쁜 사람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