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나의 힘” 안민의 회화에 이런 레토릭을 가져다 쓰는 게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차선은 될 수 있다. 이번에 발표하는 연작 < 구애 >도 이 수사법으로부터 설명이 가능하다. 젊은 화가가 뿜어내는 절망은 스스로를 연민의 구덩이에 빠트리면서도 힘으로 가득 찬 그림의 동력이 된다. 그의 작품이 지금껏 그래왔듯이 공격성은 이야기의 중심이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풀어낼 수 있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공격적인 본능을 아무 때나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문명의 핵심이다. 문명이 억누르는 갖가지 욕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심성의 얕은 부분에서 들끓고 있다. 술이 불러오는 디오니소스적 쾌락, 성과 관련된 리비도, 예술의 카타르시스가 그렇다. 안민의 그림도 이성 작용으로 걸러지지 않은 순간을 포착한 작업 결과인 셈이다.
연작 시리즈 < 구애 >가 우리에게 던지는 주제를 예술 담론 바깥에서 보자면, 이중적인 인성 구조의 내적 갈등이라는 진화심리학에서의 가정과 연관되어있다. 인본주의-야생성, 대뇌-간뇌, 문명-야만, 계산가능성-예측불가능성, 이성-감성이라는 인간의 이중성 가운데 이 화가가 순전히 후자의 영역에 더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은 틀린 견해다. 예술가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커다란 에너지에 자신을 던져야만 좋은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천만에. 낭만주의 예술가 태도가 미화한 예술가의 천재성과 비합리성이 오늘날 냉랭한 예술 제도 속에서는 한낱 일탈로 처리될 뿐이다. 이 점은 작가 관객들이나 작가 본인조차도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다. 대신, 작품은 그와 같은 이중성의 구도를 좀 더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또한 그것은 이중성이 제시하는 기준의 위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한다고 될 일일까.
규범적인 문명 안에, 그리고 미술 제도 속에 갇혀있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사는 아니다. 그는 내성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곧잘 그렇듯이 주변 정황을 잘 살피고, 그 시각을 원초아(이드 Id)의 상태까지 파고 들어간다. 처음에 작가는 주변에 맞닿은 여러 인간 유형을 묘사하면서 동물을 의인화하는 작업을 펼쳤다. 이는 현실 속에 실존 인물들을 재현할 때 생길지도 모르는 난처함을 피할 구실을 만드는 비유법으로 적절했다. 취기 오른 작가가 어떤 사람을 볼 때 떠오른 동물들, 예컨대 능구렁이 같은, 여우 같은, 곰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확신컨대 작가는 나를 보고도 뭔가를 떠올릴 것이다. 난 안 물어봤다. 들어보나마나 기분 나쁠 게 분명하니까. 그의 작품 속 비유는 사람 신체에 짐승 머리를 붙인 형태를 취했다가, 근작에 이르러서는 온전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오고 있다. 속도감 있게 그린 그림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뱉어내는데, 이는 한 편으로 만화처럼 우습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슬프고 감동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가의 연령대가 걸친 세대, 그리고 예술가라는 신분이 처한 현실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구애 > 연작은 현실 속의 자아와 타자가 상상 속에 있는 각각의 그들과 끼워 맞추려는, 하지만 결코 일치될 수 없는 상황을 그린 작품이다. 그 이미지는 부당함과 피로와 의심과 고통에 겨워 위악적일 만큼 화를 내는 모습이다. 관객들은 이와 같이 뜬금없는 난폭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가는 본인, 안민이라는 한 인격체가 가지는 가장 고귀하며 사색적인 측면을 뺀 나머지를 그림에 쓸어 담아 보여준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존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실재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예술은 필요한 것인가? 제 정신으로는 온전히 버텨내기 힘든 제도의 장벽 앞에 내 작품의 생존력은, 아니 나의 생존 자체는 보장받을 수 있을까? 나에게 미술은 뭔가?” 그림이 암시하는 작가의 모습은 삶의 실패자 그 자체다. 하지만 말이다, 근대 이후 예술은 원래 그랬다. 샤를 보들레르가 그랬고, 존 오스번이 그랬고, 마띠유 카소비츠도 그러했다. 작가 스스로가 극적으로 몰고 간 분노는 일상 속의 평정을 가능하게끔 한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번갈아 체험하는 그는 작업을 통해 점점 성장하고 있다. 실패의 삶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보증하는 수단이 작가에게는 현재 미술밖에 없다.
덧붙여, 한 가지 남은 내 궁금증.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전부 관객인 우리를 향해 분노를 전달하고 있다. 나는 예컨대 하나의 그림 속에서 그 난폭자들이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모습을 못 봤다. 이게 직설적인 멋이 있기는 한데, 좀 단순하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고달픔은 게오르그 짐멜의 주장을 빌자면, ‘2인 관계에 제3자가 끼어들면서’ 꼬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서로 부딪히면서 복잡한 갈등이 벌어진다. 그런데 안민의 그림에는 그와 같은 결탁, 음모, 질투, 따돌림 따위가 없다. 단지 한 개인이 다른 누군가에게, 또는 혼자 이 세상에 맞서는 형국만 존재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즈도 말했지만, 비극이란 너무나 벅찬 세계 앞에 주인공은 애당초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맞서는 형식이다. 작가는 야단법석인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려고 한다. 여기에 분노는 정화 체계인 동시에 질서 체계다. 우리가 작가의 태도에 동의하건 안하건 그 속에서 발견되는 일관성은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지고 있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 디렉터/예술사회학)